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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매디(마이 매디 다이어리)

평범한 왕, 루이 14세의 매력에 빠지다(+좋은 작가는 공평하다)

by 김매디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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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나는 영드 <베르사유>에 푹 빠져있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을 짓던 시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상당히 선정적이며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드라마에 푹 빠졌던 이유는, 아주 밀도 높게 만들어졌기 때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으며, 실제 역사를 흥미롭게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특히나 등장인물끼리의 대화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작가의 필력이 엄청나다고 느꼈더랬다. 대화의 구성이 아주 치밀하고 빈틈이 없는데, 그렇다고 속도감이 느껴지거나 부담스럽지 않은데다, 은유와 비유가 정말 많이 쓰였는데도 전혀 그 표현들이 억지스럽지 않았다. (간혹 명언집인지 드라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쓸데없는 허세 대사를 남발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걸 보고 있다보면 어느새 두통이 밀려온다.) 어느 캐릭터 하나 버릴 것이 없었으며, 자칫하면 복잡할 수 있는 수많은 등장인물의 관계를 아주 스무스하게 풀어냈다. 스쳐지나가는 역할에도 충분한 인과관계를 부여했고, 모든 등장인물들의 각자의 사정이 어느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너는 그럴 만하지, 근데 쟤도 그럴만 하잖아.

단박에 누가 왕인지 알 수 있다. 멀리서봐도 눈에 확 띄는 한 남자가 있지 않은가. 그래, 저기 노란 옷이 루이다.


내가 지금껏 글을 쓸 때마다 내 마음 속에 꼭 쥐고 있는 말이 있는데, 작가는 모든 캐릭터를 동등하게 사랑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보는 사람들도 그들의 삶에 몰입하고, 악역이라 할지라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것. 정말이지 이건 진리다. 어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그 부분을 간과한 작품에서는 작가가 어떤 캐릭터를 유독 사랑하는지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러면 독자는 금세 흥미를 잃게 마련. 다 자란 독자는 늘 동화 같은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끝이 빤히 보이는 길인데, 그 길을 누가 걸으려 하겠냔 말이다. 멀리서 보아도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는데, 굳이 걸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 나는 그게 작가의 흡인력을 결정하는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캐릭터들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

우리가 <펜트하우스>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순옥킴 작가님은 정말 모든 극중인물들에게 진심인 것이 느껴진다. 얘도 쟤도 다 안쓰럽고 딱한 면이 있어서 시즌 1에선 미치게 미웠던 인물도 시즌 2에선 갑자기 짠하고 그렇다. 그래서 결말 예측이 힘들다. 애초에 이게 해피엔딩 일지도 예상이 안되는데 등장인물들도 다 사연이 있다. 심지어는 극악한 주단태 마저도 피만 보면 발작 증세를 일으키는데, 과거의 인생이 그리 평탄하진 않았던 처럼 묘사된다. 특히나 우리의 천서진은 시즌 2에선 갑자기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여자로 변신, 아버지를 죽인 파렴치한 악녀에서 비련의 여주인공급으로 급부상 중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를 일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주단태에게 칼을 꽂을 사람이 누가 될지는. 어쩌면 주단태 본인이 될지도?

학창 시절 문학을 공부할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원미동 사람들>이었다.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졌다. 역시나 어떤 인물도 버릴 게 없으며, 공감가지 않는 바가 없었다.

지금의 내 오래된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게 그런 질문을 했었다.

-어떤 다큐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단박에 <인생극장>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의 인생극장이 아닌, 우리네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스펙타클하거나 너무 극적이지 않은 그런 소소하고 평범한 인생을 그린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인생극장의 애청자라면 모두 알테다, 다둥이 가족의 이야기라던가, 연세가 많으신 노부부의 이야기, 혹은 외국인 며느리와 한국인 시어머니의 이야기 등. 평범한 삶인 듯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찾기는 힘든 케이스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꼭 어떤 사건들이 생긴다. 한 번씩은 등장인물들이 꼭 다투는데, 화해하는 장면도 반드시 나와야 한다.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갖는 장면도 빠져서는 안될 코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우린 그냥 집과 회사를 오가고, 혹은 코로나로 내내 집 안에서 지내며, 생각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고,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도 가끔 있는 이벤트. 그 안에서 사부작사부작 일어나는 것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문득 와있는 엄마의 다정한 메세지 하나, 출근길에 마주하는 귀여운 길냥이들, 일하면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텐션 업, 퇴근 길에 편의점엘 들러 어떤 맥주를 마실지 고르는 고민, 그런 자그마한 것들이 우리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담은 다큐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아직도 종종 술 한 잔을 함께 하는 날이면, 우리가 만났던 그 첫 날의 대화를 다시 나눠보곤 한다. 그리고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다시 <베르사유>로 돌아와서, 나는 드라마 속 루이 14세가 생각보다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 마음에 들었다. (아, 뭐, 한 번에 여러 여자를 사랑하는 건, 전세계를 막론, 어느 왕이나 그랬던 것이니 예외로 두고) 그간 왕이라면 으레 있어야할 위엄이라던가, 비범함 같은 건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시즌3의 비밀을 위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그는 감정적이고 나약한, 그저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했다. 극 중에서 그는 늘 스스로의 입으로는 자신이 하늘이 내려준 왕이라 칭하지만,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프랑스의 통치자라는 무거운 짐을 의식하며 버거워한다. 형의 사랑과 관심, 인정을 받고 싶은 동생 필리프에게 조차도 쉽사리 자신의 부담감에 대해 털어놓지 않는다, 그저 나도 왕이라며, 왕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다며 화를 낼 뿐.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은 전장에서 능한 장군감이었고, 자신은 그런 능력은 없었으니, 왕위찬탈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터,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면 동생이 자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거라는 걱정이 있었을테다.

어쩜 이렇게 캐스팅을 찰떡 처럼 잘 했는지... 드라마에 절로 몰입이 되는 두 형제의 비주얼이다. 특히 루이의 머리스타일은 너무 예뻐서 자꾸 눈이 갈 정도.


그러나 드라마를 주욱 보다보면 필리프는 절대 루이의 자리를 부러워하거나, 욕심내거나, 탐하지 않는다. 그 자리가 얼마나 버거운지 이미 그는 알고 있고, 그걸 견뎌낼 몫은 오직 선택 받은 루이만이라는 것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그래서 중간중간 여러 사람들이 필리프에게 왕위를 노려볼 것을 제안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앙다문 입으로 화를 내기만 할 뿐, 절대 그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형의 결정에 대해 대부분 불만족스러워하지만, 열 번 중 한 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면 기꺼이 형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동생이다. 물론 그의 내면에는 왕인 형의 그늘에 가려 항상 뒷전이었던 날들에 대한 상처가 있어, 가끔 형에게 감정적으로 버럭(왕에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하지만, 그것도 딱 거기까지. 루이가 동생에게 왕위를 뺏길까봐 두려워 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차라리 루이와 멀리 떨어져있으면 있었지, 배신하는 일 따윈 절대 없을 그런 의리 있는 캐릭터다. 즉, 루이든, 필리프든 둘 다 아주 입체적인데다가, 엄청나게 평범하다. 특이사항이라곤 두 형제가 다소 감정적이며, 왕과 왕의 동생이라는 점, 정도?

그래서 사실 난 두 형제의 케미를 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간혹 작가가 살포시 넣어둔 웃음 포인트들이 있는데, 억지로 웃기려고 넣어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스치듯 지나가는 현실감 넘치는 포인트들이라 더욱 재미지게 다가왔다. 둘이 내내 싸우다가도 형이 원하는 걸 주면 또 못이기는 척 동생이 따라가 주는 장면이나, 혹은 세상 둘도 없는 형이라며 좋아라하다가도 별 것도 아닌 걸로 삐져서는 형을 살짝 째려보며 비아냥 거리는 장면이라던지. 정말 현실 같다고 느꼈던 건, 딱히 형제 싸움에는 엄청난 건 없었고, 그렇다고 화해를 대놓고 하는 것도 없었다. 모든 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만약 이 형제가 좋거나, 나쁘거나, 딱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면만 가졌더라면 시즌 3까지 볼 흥미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 역시 이 둘을 사랑하는 작가가 공평한 애정을 넣었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누구하나 부각되지 않는 평등한 작가의 손길(?) 덕이랄까.

예쁜 헨리에타. 짧게 나오는터라 더욱 아쉬웠다. 루이와 필리프 사이에서의 케미도 아주 좋았는데, 아쉽.


어쨌든, <베르사유>를 보면서 느꼈던 건,
1. 결국은 왕도 똑같은 사람이다
2. 좋은 작가가 되려면 평범한 것들을 치밀하게 엮되, 모든 캐릭터를 사랑해야 한다
3. 시즌 1의 헨리에타가 너무 예쁘다
였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정주행하고픈 작품. 드라마를 보면서 중간중간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 역사도 찾아보게 되는, 정말 유익한(?) 드라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 넷플릭스에서 아주 핫했던 <브리저튼>을 보고 <베르사유>를 바로 연이어 보았는데, 전자의 핫함은 그저 손난로의 뜨거움 정도라면, 후자는 펄펄 끓는 용암 수준. 두 작품이 만들어진 의도가 전혀 다르므로,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보고 싶다면 <브리저튼>을, 딥하게 몰입하고 싶다면 <베르사유>를 추천하는 바다. 두 작품 모두 보고 싶다면, 반드시 <브리저튼>을 먼저 보기를 추천. <베르사유>를 먼저 보면 절대 <브리저튼>이 재밌게 느껴지지 않을테니까. B로 예열하고 V로 뜨겁게 마무리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

루이 14세와의 만남을 추천하며,
오늘도 이만, 통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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