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디어. 매디(마이 매디 다이어리)

착한 아이 증후군(Good boy syndrome) 탈출기

by 김매디 2021. 3. 22.
반응형

나는 제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쉽게 양보해버리는 아이들을 보면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짠해져 온다. 그리고 그걸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통탄스럽다. 네가 첫 째니까, 혹은 네가 동생이니까, 최악은 네가 착하니까, 양보하자. 나는 그런 식의 멘트를 듣고 있자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양보했던 그 무언가(이를테면 장난감이나 색연필 같은)를 도로 빼앗아 그 아이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왜 타고난 것으로 자꾸 양보를 하란 걸까, 내가 첫 째, 혹은 동생으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보다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주면 안되는 걸까.

어린 아이라서 잘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리기 때문에 그 앞에선 더욱 말조심, 행동조심을 해야하는 법이다. 괜히 옛말에 아이 보는 데는 찬 물도 못 마신다는 말이 생겼을까. 양보하면 착한 것, 내 것을 다 잃고도 웃으면 착한 것, 그렇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런 식의 교육은 자녀를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리기 딱 좋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바로 그 착한 아이였다.

배달 음식을 하도 시켜먹었더니, 이런 것도 받아봤다. 처음 받았을 땐 커피컵 모양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다 쪼개어 재조립(?)을 했다. 재조립한 녀석은 책상 한 켠에 잘 걸려있다.


사실 나는 타고난 성향 자체가 사람을 좋아하고 잘 웃는 그런 아이였다. 어쩌면 약간의 관종(?)끼도 있었지 싶다. 어릴 때 밖을 데리고 나가면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모두 인사를 드리지 못해 아주 안달이었다고 했다. 생판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다니, 이 무슨. 지금의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뭐, 그 땐 그랬다고 한다. 난 내가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것이 우리 엄마나 아빠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당신들께선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 공평했다면 공평했지, 네가 누나니까 무조건 양보해라, 라던가, 양보한 것에 대해 착한 아이, 라고 칭찬한 적도 없었다. 뭐, 양보랄 것도 없었다, 어릴 적엔 부족함 없이 컸고(아니, 그렇다고 금수저였단 건 아니다) 항상 내 것과 동생 것은 명확히 구분 되어있었다.

나의 착한 아이 가면은 학교를 가면서부터 생겼던 것 같다. 정확히는 초등학교 5학년을 지나면서부터. 아마도 그건 사회에 섞이기 위한 내 나름의 몸부림이었지 싶다. 저학년 때는 반장도 몇 차례 했었고, 주변 어른들은 나를 뭐든 잘하는 아이, 또래보다 성숙한 아이라고 불렀다. 학교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물론 내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고, 기억하기도 쉬웠다)였고,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약간의 관종이었어서, 그런 관심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어딜 가나 주목 받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고, 뭐든 잘하는 아이라는 타이틀도 마음에 들었다. 그 땐 실제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뭐든 잘 했었다. 자랑이 아니라, 그 땐 진짜 그냥 그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땐 누구나 잘하는 법이고, 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빠른 그런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약간의 따돌림을 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따 였다고 할 수 있다. 워낙에 유명한(?) 아이였기에, 아이들은 날 대놓고 따돌릴 순 없었고, 내가 없을 때 내 의자를 밟거나, 내 지우개를 가져가서는 자기 것이라고 우기거나, 하는 등의 아주 치사하고 은근한 따돌림이었다. 나는 사회화가 덜 된 관종 공주님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그게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을테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했겠다, 싶기도 하다.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상상을 많이 했던 아이였고, 심지어는 현실 속으로 상상을 끌어오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학기 초 어울렸던 친구들도 문제였는데, 나와는 성향이 전혀 다른 아이들이었다. 걔네들은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애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왠 범생이 같은 애가 껴있으니, 얜 뭔가 싶기도 했겠지. 5학년의 첫 단추가 그렇게 엉망으로 끼워졌고, 그 때는 담임 선생님마저 나를 편애했던 선생님도 아니었던 터라, 나는 그렇게 호되게(?) 첫 사회화를 겪었다.

그리고 올라간 6학년,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 무리와는 다른 그룹의 아이들이었고, 나는 순조롭게 가면을 쓴 채, 초등학교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을 보냈다. 모두가 나를 착한 아이라고 불렀고, 그 때는 처음으로 단짝도 생겼으며, 함께 노는 그룹도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쭈욱, 학창시절을 보냈다. 나는 항상 잘 웃는 아이였고, 착한 아이였으며, 순한 아이였다. 물론, 내가 그렇다고 원래가 우울하고, 못돼먹고, 다루기 힘든 타입이란 소린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라하면 늘 양면이 존재하는 법이지 않는가. 문제는 그것이었다, 내겐 양면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

우리 엄만 이렇게 자그마한 식물에다가 내 이름을 붙이고는 나처럼 쑥쑥 잘 자라라는 의미라며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우리 엄마.


우리 부모님은 내게 착한 아이가 되라고 한 적이 없다. 무조건 양보만 하라고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우리 엄만 내게 늘 욕심이 없냐며 화를 냈을 정도니까. 하지만 내가 속했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최대한 순응하고, 튀지 않고, 착하게 있는 것. 설령 내 것을 빼앗기더라도 괜찮다며 웃는 것.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내게서 잘못을 찾아 스스로를 탓하는 것. 그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모르겠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 때 당시의 내가 선택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 스스로 착한 아이 가면을 쓰는 것.

아주 다행스러운 건 대학교를 가면서부터 천천히 그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좋은 사람들과 아르바이트를 하고, 내가 주도적으로 내 삶을 그려나갈 수 있게 되면서 그렇게 나의 양면을 드러낸 채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대학교 교양 수업으로 들은 각종 심리학 수업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수업들은 내가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착한 아이 증후군 역시 그 때 처음 접했던 용어였다. 그 단어를 처음 듣고,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탁! 하고 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때부터는 내 감정과 생각들을 가감없이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익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돌리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 늘 대학생 때를 짚는다. 가면을 벗은 나로 돌아오게 했던 시절 말이다.

조금 슬픈 건, 어릴 때의 나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꼬꼬마 당시의 나는 두려운 것이 없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못해 그 속에 살았던 아이었다. 해맑고 반짝반짝 빛났으며,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가득했다. 가면을 쓰면서부터 나는 두려운 것이 생겼고, 상상보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란 것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 까만 유성 매직과도 같은 것이라, 한 번 마음에 칠해지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인간관계가 제일 간절하면서도 어렵고,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으면서도 늘 두렵다. 내가 노출되는 사회의 범위가 넓어질 수록 궁금하면서도 무섭다,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그 사람이 나의 착한 아이 증후군을 다시 발동시키는 건 아닐까.

최근, 나의 착한 아이 증후군을 다시 발동 시킨 사람이 한 명 나타났는데, 천만 다행인 건 얼굴을 본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아마 꽤 오랜 시간을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지내게 될 것이며, 부딪힐 일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 그 사람의 잘못이었는데도, 나는 어느 순간 그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내 잘못으로 돌리고 있었다. 소름. 그 일이 있고나서 한동안 매우 우울했다. 나는 나름 내 위치에서 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아주 무능력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직에 대한 고민까지 하고 있던 터라 그 우울감은 더 심했었다. 다행히 금세 상황을 깨닫고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런 사람과 함께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불행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그런 사람과 맞서 싸우지 못하나, 라고 또 다시 자책을 하려다가, 이내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라는 명언(?)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네에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예술적으로(?) 맛있는 집이 있다. 오레오 케이크는 별로. 하지만 딸기 생크림 만큼은 정말 넘버원이다.


마치 이건 금연과도 같다, 평생을 참는 담배마냥, 착한 아이 증후군도 잊을 만하면 고개를 든다. 한 번이라도 걸리면 평생을 그렇게 잘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제발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무조건 착하기를, 무턱대고 양보하기를 강요하지 말라는 거다. 착하다고만 칭찬하지 말고, 제 것을 잘 찾는 것, 잘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칭찬해주었으면. 아무리 그들만의 작은 세계라도, 사회는 사회인 법. 부디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는 법에 대해 알려주길. 나를 지키며 양보하고, 내 것을 쥐고도 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면. 아직까지도 착한 아이 증후군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서른이 홀짝 넘은 어른이 안타까움에 하는 말이다.

지금도 나는 내게 착하다고 하면 기분이 묘하다. 착하다는 그 말이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막상 그렇다고 나한테 은근 성격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기분이 좀 그렇더라. (어쩌라는 걸까, 나 자신) 그래서 요즘은 그냥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참 좋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그건 그냥 취향과도 같은 말이라, 마냥 착할 필요 없는, 내가 착한 가면을 뒤집어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같아서, 그렇다.

우리 모두 착한 사람이 아닌, 좋은 사람이 되자.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그 이전에 나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

간만의 기나긴 끄적임에 함께 해주어 무한 감사를 표하는 바, 이번에야 말로 꼭 책을 한 권 더 내어보겠다며 굳은 다짐을 해본다.
오늘도 이만, 통통통.

*착한 아이 증후군(Good boy syndrome):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면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착한 아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의 특징: 언제나 밝고 명랑하다 / 작은 것도 양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사과한다 / 규칙을 지키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