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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매디(마이 매디 다이어리)

<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출판사 _ 1부 필사

by 김매디 2020.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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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숲을 보고 있는데, 남준이랑 윤기가 책을 읽고 있었다. 근데 뭐지, 묘하게 표지가 익숙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네?’ 출간되었을 때 사놓고 여지껏 읽지 않았던 <아몬드> 였다.

아주 빠르게, 순식간에 읽히는 책. 주인공이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것이 문장 하나하나에서부터 느껴진다. 그래서 부러 더 천천히 속도 조절을 하며 읽기로 했다.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은 1970년대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이다.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는 감정 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다만 공포, 불안감 등과 관련된 편도체의 일부는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1부

20페이지~21페이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어느 날 하굣길에 내 앞을 걷던 여자애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걔가 엎어진 채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애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여자애의 뒤통수에 매달린 미키마우스 머리 끈만 바라봤다. 하지만 넘어진 애는 자리에서 울기만 했다. 갑자기 그 애의 엄마가 나타나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나를 흘기며 혀를 찼다.
-친구가 다쳤는데 괜찮냐고 물어볼 줄도 모르니? 소문은 들었지만 애가 정말 보통이 아니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감지한 아이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소곤대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모르긴 해도 아줌마가 한 말의 메아리 같은 말들이었을 거다. 그때 날 구한 건 할멈이었다. 할멈은 어디선가 원더우먼처럼 등장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제 복이 없어서 넘어진 거지, 어디서 남 탓이야?
걸걸하게 일갈한 할멈은 아이들에게도 한소리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뭐가 재밌다고 보고들 있어? 못난 것들.
무리에서 꽤 멀어졌을 때쯤 할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꾹 다문 입이 앞으로 쭉 내밀어져 있었다.
-할멈, 사람들이 왜 나보고 이상하대?
할멈은 내민 입을 집어넣었다.
-네가 특별해서 그러나 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 걸 배기질 못하거든. 에이그, 우리 예쁜 괴물.
할멈이 나를 으스러져라 안는 통에 갈비뼈가 아렸다. 전부터 할멈은 나를 종종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 단어는 적어도 할멈에게만은 나쁜 뜻이 아니었다.

31페이지~32페이지

의사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흥미로운 고깃덩이로 바라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의사들이 나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접었다. 고작해야 이상한 실험을 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인 뒤 내 반응을 관찰해서 학회에 가서 뽐내는 게 다겠지. 이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많은 엄마들이 흥분할 때면 던지곤 하는 흔해 빠진 데다 설득력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 애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병원에 발길을 끊던 날 엄마는 병원 건물 앞 화단에 침을 뱉은 뒤 이렇게 말했다.
-지들 대가리 속도 모르는 것들이.
엄마는 가끔 그렇게 난데없는 호기를 부릴 때가 있었다.

35페이지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튀지 말아야 돼. 그것만 해도 본전이야.
그 말은 들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걸. 그걸 들키면 튀는 거고 튀는 순간 표적이 된다.

38페이지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39페이지

침묵은 과연 금이었다. 대신 ‘고마워.’와 ‘미안해.’는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 두 가지 말은 곤란한 많은 상황들을 넘겨 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여기까진 쉬웠다. 상대방이 내게 먼저 천 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이삼백 원 내주는 것과 비슷했다.
어려운 건 내가 먼저 천 원을 내는 거였다. 그러니까, 뭔가를 원한다거나 하고 싶다거나 어떤 것을 좋다고 표현하는 일들. 그런 게 힘든 이유는, 여분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돈을 내야 하는데 나는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얼마를 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잔잔한 호수에 억지로 파도를 치게 만드는 것처럼 버거웠다.

51페이지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 랑. 사아아라아아앙. 사랑. 사랑사. 랑사. 랑사.
영원. 영원. 영원. 영. 원. 여어엉. 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 처럼.

54페이지

첫눈이 내리기 얼마 전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낯선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짧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줄 알았다. 그걸 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건 머리칼이 아니라 주름이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꽤 깊이, 그리고 길게 파여 있었다. 처음으로 엄마가 늙는 걸 알았다.
-엄마도 주름이 있네.
내 말에 엄마는 방긋 미소를 지었고, 그러자 주름이 길게 뻗어 갔다. 나는 점차 늙어 가는 엄마를 상상해 보았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엄마에게 남은 건 늙는 일밖에 없단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얼굴엔 웬일인지 웃음기가 지워져 있었다. 엄마는 무표정하게 먼 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63페이지

남자의 삶과 기록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자, 대중의 관심은 사건 자체보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조명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삶이 자기네들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중년 남자들은 비탄에 빠져 탄식했다. 남자에 대한 동정 여론이 퍼지기 시작했고, 초점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대한민국의 현실로 옮겨 갔다. 누가 죽었는지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건은 얼마간 뉴스를 장식했고 기사엔 ‘누가 이 남자를 살인자로 만들었나’, ‘웃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대한민국’ 따위의 표제가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지듯이 그마저도 사람들의 입에 더는 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열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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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출판사 _ 2부 필사

속도감은 여전, 새로운 등장인물 등장. 약간 <운명적 만남으로 인연 잇기> 다소 억지(?) 인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알고 봤더니, 네가 걔였어? 이런 거...) <아몬드> 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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