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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매디(마이 매디 다이어리)

나는 내 아이를 위해 부모이기를 포기했다.

by 김매디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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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아이와 부모를 제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딱 적합하다. 아이든 부모든 나와 긴 시간을 마주하진 않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게는 되는데, 내가 가르치는 선생님도 아닐 뿐더러, 나누는 대화가 대개 돈과 직결된 부분이기도 하니, 언뜻언뜻 그들의 민낯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내 직업이 아주 재미지다.

굳이 이 직업을 어떤 테두리 안에 넣자면,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나를 고용하는 고용주들은 내가 뛰어난 프로그래머이며, 꼼꼼한 회계사에, 감각있는 디자이너이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마케터이자, 친절한 상담사, 그리고 똑똑한 비서이길 바란다. 나는 그런 자리에 있다. 내 직업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적어보려한다. 오늘은 내가 왜 부모가 되기를 포기했는지에 대해, 그게 왜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혹은 존재할지 어떨지 여부조차 알 수 없는) 내 아이를 위해서 인지 끄적거려 보기 위해 내 직업을 언급했다. 나는 사교육업계에 있고, 데스크(그렇다, <행정, 상담, 교무>라고도 부르는 그 자리다)를 지키는 사람이다.

내 첫 아르바이트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24시간 독서실 겸 카페였다. 주 고객들은 편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 회계사 시험 준비생, 사법연수원생들, 그 외 각종 고시(사법고시, 행정고시 등) 준비생들이었다. 그 이후에도 나의 행보(?)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학원가의 서점이나, 학원의 데스크 아르바이트, 그리고 또 다시 독서실. 중간에 1년 반 정도 방송작가를 했던 시절을 제외하면 나는 줄곧 사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학부모들과 학생들을 마주해왔다.

5세부터 다 큰 성인들까지. 학구열이 넘치는(?) 대한민국답게 학생의 범주는 대단히 넓다. 그래서 학부모의 범주도 참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케이스들을 상대하는 자리가 바로 내 자리다. 대학생 때부터 10년 가까이 그들을 마주한 나의 변하지 않는 철칙 하나는, ‘속단은 금물’.

아주 어릴 땐 사람을 참 좋아라했더랬다. 속 없이 사람을 믿었고, 한 번 정을 주면 퍼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할 줄 몰랐다. 그렇게 똑같은 마인드로 데스크에 앉았더니 내 속이 걸레짝이 났다. 물론 정말 좋은 분들도 많았다. 가르치는 선생님도 아닌데, 무슨 날만 되면 이것저것 가져다 주시는 학부모님들부터, 항상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물어주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모든 것엔 양면이 있는 법.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 그렇게 수많은 방법이 있을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여튼 그럼에도 내가 이 일을 계속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예정인 이유는, ‘아이들을 내가 원하는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아이들의 부모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 때부터 나는 ‘즐거운 배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배워야만 할까, 좀 더 재밌게 배울 순 없을까.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고, 아이들에게 그것이 네버랜드에서 피터팬을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네 교육은 피터팬은 커녕 피 터지게(?) 싸워서 1등이나 하라고 부추길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하루하루 삶이 새로운 배움으로 가득 차 놀랍고 재밌다고 외쳐야 하는데, 오늘도 시험에서 하나 더 틀렸다고 부모님께 혼날까봐 머리를 쥐어 뜯는다.

2016년도에 연남동의 한 술집에서 찍었던 사진이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꺼내마실 수 있는 작은 펍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았다.


재수생들이 가득했던 곳을 다녔을 때의 일이다. 나는 늘 그 학생들에 대한 대견함과 안쓰러움을 품고 있었고(나는 재수는 절대 못하겠다며 하향 지원을 해서라도 올해에 입학하겠노라 외쳤던 애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내 고3 시절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착한 아이들은 그런 나를 참 좋아라들 해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인생의 고비를 남들보다 좀 더 빨리 맞이한 그들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그걸 고비처럼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그 때 할 수 있는 거라곤, 더 많이 웃어주고, 이름을 외워 불러주고, 가끔 아주 가끔 자그마한 일탈을 눈감아 주는 것 뿐이었는데, 고맙게도 아이들은 또 그걸 감사하다 말해주었다.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진행되던 학부모 설명회라는 것이 있었다. 신규생 모집과 원생 유지를 위해서 대형 학원, 특히 입시 학원들은 연례 행사처럼 설명회를 하곤 한다. 백명 가까이 되는 학부모들 앞에서 당시 원장님이 했던 멘트를 나는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여기서 이번 달에 나 책 한 권이라도 읽었다, 손 들어보세요. (학부모들 정적) 네, 쉽지 않아요, 쉬운 일 아닙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논술 준비한다고 책까지 읽어야하고. 여러분도 못하는 걸 ‘우리 애는 왜 못할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주 속이 시원해지는 멘트였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영재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때문에 입학 여부가 타고난 지능지수로 갈리는데, 개인적으론 안타깝지만 그런 입학 절차가 이해는 된다. 내가 생각하는 즐거운 배움에 가장 근접한 곳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인데, 그 교육을 모두가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영재들과 평범한 아이들이 함께 교육을 받는 건 서로에게 독이 되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절차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나 평범한 아이들도 그런 즐거운 배움을 경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 오는 학부모들은 대개 두 종류다. ‘기대가 높은 학부모’와 ‘그렇지 않은 학부모’. 그리고 대개는 그렇지 않은 학부모의 자녀가 영재일 가능성이 높다. 신기하게도 그렇다. 또한 지능지수에 대한 만족도도 전자의 경우엔 합격점이 나오더라도 불만족스러워 하는 경우들이 많다.

-우리 애는 더 잘 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 아쉽네요, 선생님

음... 얼마나 더 똑똑해야 하지...? 만족을 모르는 학부모 밑에서 자라는 학생은 늘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칭찬을 듣기 위해서 고래를 춤추게 만들어야 할 판이니, 그마저도 잘 춰야 된단다. 그 영재는 영재성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정말 뛰어난 영재인 아이들은 딱 30분만 함께 있어도 알 수 있다. 전혀 손이 가지 않는다. 어떤 활동이든 주어지면 이 세상에 나와 그 활동만이 남는 느낌이다. 평범한 아이들이 유튜브 영상 15분짜리를 볼 때도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중간중간 선생님을 부르며 부모의 부재에 대해 계속 의문을 품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그렇다고 영상 하나를 혼자서 다 볼 수 있다고 영재는 아니다. 영상 하나는 얌전한 성향을 가진 평범한 아이라면 모든 충동을 잘 참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미로 찾기가 된다면? 숫자 거꾸로 쓰기가 된다면?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기가 된다면? 책읽기가 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또한 그 활동을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도 척도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로찾기에도 단계가 있다. 가장 쉬운 단계가 1단계, 가장 어려운 단계가 5단계라고 가정하자. 아이가 3단계 활동을 마친 후, ‘친구야, 이것보다 더 쉬운 것도 있고, 더 어려운 것도 있는데, 어떤 걸 해볼래?’ 라고 물어보면 평범한 친구들은 대개 같은 단계를 고르거나, 더 쉬운 단계를 선택한다. 그러나 영재들은 고민 없이 어려운 걸 고른다. 그 아이들은 어려운 단계를 해결했을 때의 성취감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단계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재미있어 하고 더 나아가 즐긴다.

짧은 대화를 할 때도 영재의 특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그림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할 때, 평범한 아이들은 단답으로 대답하거나, 모른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명을 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팩트만 있다. 물고기를 그리면 설명은? ‘물고기’가 다다. 왜 그렸냐면 ‘그냥’. 물론 말을 잘하는 아이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그림 하나만 가지고 어른과 대화를 지속해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옆에서 계속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물고기 옆에 조개도 그리고 물풀도 그린다.

그러나 영재들은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림 하나에도 디테일이 있으며, 스토리텔링이 있다. 그림 속 물고기를 왜 특정 색깔로 칠했고, 이 물고기는 왜 다른 물고기와 다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까지 그려낸다. 이름을 지어주는 건 아주 당연하다. 만약 수중 생물에 특히 관심이 많은 영재라면, 아이의 나이에 상관없이 물고기의 종과 그에 따른 생김새, 그리고 물고기의 구체적인 기관들(아가미, 부레 등)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이곳의 아이들 두 명과 스무고개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설명을 잘 하지 못했는데도 아이들은 놀이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이해하였으며, 심지어는 재미있어 했다. 특히 그 중 한 친구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수중 생물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고, 그 아이가 내는 문제는 한 문제도 맞출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두 문제를 냈었는데 정답들이 <날치>와 <고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아이는 7세였다.

이곳의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물론 나는 말을 조심하지만, 어른과 대화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7세 정도만 되도 스스럼 없이 대화가 가능하며, 부모님의 상황에 대해 (차가 막혀서 늦게 오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등) 이야기하면 떼쓰거나 우는 경우가 없다. 그 외에도 모든 대화가 나의 답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냥 거짓말로 달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이유를 제시하면 오케이. 영재들은 작은 어른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미성숙한 어른들? 그래서 이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자라고, 그만큼 빠른 시기에 생각보다 쉽게, 많은 상처를 받는다.

이곳의 어떤 아이가 어머니의 상담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다니고 있는 영어 학원까지의 경로를 상세하게 그린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어릴 적 우리 동생 같아 신기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며 함께 그 지도를 완성했었다. (놀랍게도 나와 내동생은 영재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상담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달려가 지도를 보여줬지만, 안타깝게도 아이의 어머니는 스케줄에 쫒기는 상황이었다. ‘어, 어, 그래, 그래’를 연발하며 어머니는 아무 생각없이 받아든 그 그림을 구겨버렸는데, 그 순간 아이가 대성통곡을 했다. 모두 입구를 나서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 친구들은 자신의 그림(때론 낙서 같기도 하지만, 귀여운)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특히 자기가 애착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그린 그림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대개의 부모들은 그린 그림을 집에 가져갈 건지 물어보는데, 간혹 가다가, 정말 간혹, 무신경한 분들께서 그냥 냅다 쓰레기통으로 넣는 경우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경우 아이도 무신경한 편이라 그냥 쿨하게 집에를 가는데, 그 아이는 정반대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잠깐 대화를 나눈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그림을 구겨버렸다. 두둥.

아이는 울면서도 내가 왜 상처받았고, 왜 우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열심히 그렸는데, 엄마가 구겨버렸다,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도 ‘아, 그래, 자(구겨진 그림을 펴며), 됐지?’가 전부였다. 아이는 계속 울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미 구겨졌잖아’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으셨다. 물론 나는 그 짧은 순간만 보았고,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미안하다고 했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해주셨을 수도 있다, 잠자리에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까 엄마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미안해, 우리 아가, 다음에 엄마랑 더 멋진 지도 한 번 완성해보자’ 라고 해주셨을지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안타까웠다.

영재들은 다른 또래보다 지능적으로 빨리 어른이 된다. 그런데 마음이 자라는 속도는 또래랑 같아서,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 어른 같다고 진짜 어른처럼 대하면 상처받는다. 뇌만 어른이지, 마음은 말랑말랑 아가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어릴 때 흑맥주를 좋아했다. 기네스, 스타우트, 코젤 등. 근데 요즘은 목 넘김이 부드럽고, 쓴 맛이 덜한 맥주들이 좋다. 싱하, 오비라거, 제주 위트 에일 등.


나는 아이들의 지능지수가 기대했던 것보다 낮다고 기분 나빠하고, 그 감정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부모들도 보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들도 보았는데, 그게 딱히 둘 중 더 낫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 아이가 지능이 높으면 기분이 좋겠지만, 그게 칭찬 할 일인가, 싶다. 타고난 것을 칭찬하면 그 아이는 앞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릴 땐 영재였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가 원하는 바람직한 학생(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이 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게 그 때문이다.

기본적인 지능지수는 타고나는 것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면 올라간다고도 알고 있지만, 아주 평범한 친구가 엄청난 영재가 되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나는 그 지능지수가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아이의 성향과 기질, 그리고 부모과의 궁합이 더 중요하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지능지수의 의미는 딱 거기까지다. 내 아이가 영재이길 바라는 학부모들에게 나는 그 예전 재수학원의 원장님 멘트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영재를 키울 부모가 될 준비는 되셨나요?

돈이면 다가 아니다. 좋은 선생님 붙여서 좋다는 학원 보내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란 거다. 프린세스 메이커가 아니라, 사람, 인간을 양육하는 문제다.

영재 뿐만이 아니다. 이 넓은 세상에 부모가 될 준비가 충분히 되었을 때 아이를 갖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오죽하면 그런 말들이 있었을까. 첫 째는 예쁜 걸 모르다가, 둘 째때가 되어서야 조금 깨닫고, 나중에 손자, 손녀를 봐야 정말 예쁜 걸 안다고. 뭐 그런 이야기들도 있다, ‘닥치면 다 한다’ 세상에.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그냥 시험 공부 벼락치기 하듯 하면 되는 일이라는 건가. 다행히 요즘은 무조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분위기가 예전보단 덜한데, 그렇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니 여전히 출산과 육아가 그냥 한 인간의 일생에 거쳐야 하는 과업 같은 걸로 여겨지는 것이 너무나 속상하다.

아이를 키우는 건 아주 신중해야하는 문제이며, 그래서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야 한다. 한 인간의 인생을 책임지는 일인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가능한 일일까. 내 인생, 내 앞가림도 하기 벅찬데. 난 프린세스 메이커 할 때도 공주 한 번 못만들어본 사람으로써, 일찌감치 부모가 되는 건 포기했다. 게임도 못하는데, 살아 숨쉬는 내 새끼는 어떻게 키우겠는가. 너무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주변에 벌써 부모가 된 내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용감하고 대단하다. 또 예쁘게 잘 키워내는 걸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멋진 내 친구들.

나는 영재였고 특목고를 거쳐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내 자랑을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건 내 기준에서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가 특목고에 진학했으면 좋겠고, 내가 그곳에서 얻은 긍정적인 것들을 똑같이 얻었으면 좋겠다. 대학도 꼭 갔으면 좋겠고, 되도록이면 서울, 4년제였으면 좋겠다. 이 모든 건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경험했던 좋은 것들을 내 아이도 같이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아들이 아니라 딸이길 바라며, 나처럼 엄마랑 친구처럼 지내길 바란다. 미주알 고주알 이것저것 터놓고 말하고 여기저기 함께 놀러다니며 모녀가 세트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또 나와는 달리 애교가 많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잘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사랑 받았으면 좋겠고, 내가 가진 단점들은 되도록 물려받지 않고 장점만 뽑아 모아두었으면 좋겠다.

자, 이제 내가 왜 내 아이를 포기했는지 알 수 있을테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내 아이는 특목고에 진학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으며, 대학을 안 가고 싶어할 수도 있고, 생각보다 나와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성향일 수도 있으며, 내가 잘해주려고 하는 게 아이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할 수 도 있고, 나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그런 아이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잘 키운다는 정의가 무얼까?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 아이는 내가 부모가 되면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애정’이라는 테두리에 내가 아이를 꽁꽁 싸매서 ‘질식’해 스스로를 잃거나, 테두리를 찢고 나와 ‘도망’쳐 버릴 것이다. 그럼 그 때 내게 몰아치는 감정들을 내 아이에게 내가 쏟아내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분명 그렇게 하지 못할테다. 아이는 불안해할테고, 행복할 수 없을테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부모가 되기를 포기했다. 부디 황새가 더 좋은 부모에게 물어다 주기를.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내 아이가 나한테 생선 살을 발라줘야 할거야. ‘엄만 왜 이런 걸 못해’ 라고 하면서.

그렇게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내 자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키울 수 있을까? 내 생선살도 내가 못발라먹는데?

내 아이 하나의 행복보다, 내 아이가 아닌 아이들의 행복을 찾아주는 것을 목표로 하기로 했다.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좋은 부모님들 밑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이를 키워보지도, 키울 생각도 안하면서 어떻게 하겠냐 묻는다면, 글쎄,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댔고, 등잔 밑이 어둡다 하니 부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내가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야말로 제 3자니까.

언젠간 <부모자격증>이 생기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보다 좋은 부모들이 많아지기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좋은 부모님들과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도 이만, 통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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