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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매디(마이 매디 다이어리)

신과 함께 (종교와 죽음, 그리고 그 너머의 것에 대하여)

by 김매디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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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우리집에는 부처의 일생을 그린 ‘석가모니’ 만화책과, 천지창조(아담과 이브)와 모세의 기적 그리고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담은 동화책이 있었다. (그 중 제일을 꼽자면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응?) 외할머니는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절에를 나가시는 불교신자, 친할머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는 천주교신자,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무교다. 짠. 덕분에 부모님께서는 나와 내동생에게 종교에 대한 강요를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햇님과 달님>이나 <우렁각시> 같은 재미난 이야기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넓게 펼쳐두었다. 스스로 접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끔 했고, 때문에 우리가 특정 종교를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집에서는 전혀 문제되는 일이 아니었고, 이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실제로 동생이 대학생 때 불현듯 천주교신자가 되겠다며 세례를 받겠다 했을 때도, 그러려니 하셨고, 그러던 동생이 점점 흥이 떨어져 성당에 가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러려니 하셨다. 게다가 내가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미션스쿨에 시달리면서도(?) 기독교신자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셨다. 그렇다고 특정 종교를 나쁘다고 이야기 하시거나, 혹은 무조건 좋다고 이야기 하시지도 않았다. (나중에 우리 남매가 다 자라고 나서는 종종 그런 발언들을 하시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집 안에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같은 우리 가족들 안에서만 어쩌다 한 번 나오는 짤막한 주제일 뿐이다) 그래, 그러려니. 이런 집에서 자랐기에, 나는 종교를 하나의 학문으로 생각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그것이 참 다행스럽다.

여의도 맛집이라고 검색했더니 <플러피>가 나왔다. 여자 셋이서 메뉴 네개랑 맥주 두 병 시켜서 클리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해서 가격은 99000원... 저 맥주 맛있었는데.


나는 절에서 풍기는 싸한 나무향과 향을 피우면 올라오는 그 냄새를 매우 좋아한다. 다리만 저리지 않는다면 몇 시간이고 그대로 앉아 명상을 하고 싶을 정도. 부처님의 인자한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생각이 많은 나에게 절이라는 공간은 쉼터나 다름이 없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는 것과, 말없이 밥을 먹어야 하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허구헌날 템플스테이를 했을 테다.

성당엘 가면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시원함이 있다.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높다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부터 훅! 하고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신부님께서 말씀 시작 전에 기도해주시는 걸 좋아하는데, 딱히 그 내용 때문은 아니고. 신부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돌 벽을 탁 치고 내게 돌아올 때, 그 때 비워졌던 내 속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 차오름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중간중간 신도들이 아멘을 외칠 때마다, ‘아니야! 나는 신부님 말씀만 듣고 싶다고!’ 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낸다.

7년을 미션스쿨에서 지내면서, 채플이란 것을 3년은 거의 매일, 4년은 일주일에 한 번 의무적으로 했다. 교회에서 느낄 수 있는 건,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 특히 찬송가가 그러한데, 역시나 가사와는 별개로 멜로디가 좋아서 좋아라했던 찬송가들이 몇 개 있었다.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송가는 아직도 입에 붙어 떠날 줄을 모른다, 세상에나) 고등학교 때는 찬송을 부르며 율동을 더해 반별 대항전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 반이 우승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 이런 글을 쓰다보니 이런 기억도 떠오르고 한다. 와우. 그 종교 특유의 흑백논리만 아니었더래도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음, 아니다, 나라는 사람은 천지창조부터 믿지를 못하니 애초에 글렀다. 하하.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해왔는데, 그것이 구체화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나에게 죽음이란,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그 전까지는 내게 죽음은 그저 막연한 것이었다. 아주 단순한 치기 어린 호기심.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단테의 ‘신곡’에서 처럼 천국과 지옥으로 나뉠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어떤 세상이 기다릴까, 바로 환생을 하게 되는걸까, 환생한다면 내 기억은, 지금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은데, 정도였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아주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입원한지 딱 하루만에 눈을 감으셨다.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누워계시던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때 의식이 있으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할아버지께서 나와 눈을 마주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날 만난 외할아버지는 하얀 천을 덮고 계셨다. 중환자실에 계셨기에 임종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 그게 다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우는 것 뿐이었다, 마냥 우는 것. 화장을 하고 외할아버지를 뿌려드리는데, 내 손으로 그 따뜻한 하얀 뼛가루를 만지면서, 이것마저도 다정했던 우리 할아버지 같네, 라고 생각했다. 보고 싶은 우리 할아버지.

그 이후로 내게 죽음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 되었다.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영원한 이별. 앞으로 나는 이 고통스러운 이별을 수십차례 반복해야 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헤어짐을 매번 잘 극복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목숨이 다했을 때 찾아오는 결별이라면, 나는 그 결별에 준비가 되었을까,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영원한 어둠, 눈을 뜨고 또 떠도 끝나지 않는 꿈 속에 갇히는 것이 죽음이라면, 너무나 무서울 것 같지 않은가.

인간은 나약하다. 특히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 이를테면 죽음을 넘어선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두렵지 않다고 입으론 뱉을지라도, 알지 못하는 세계로 내던져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인간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가진 기본적인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세계’지, 어떠한 공간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 의지도, 생각도 없이 검은 허공에서 부유하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소멸하거나 환생을 하게 될 수도. 이것도 그저 나의 상상일 뿐이다. 누군가가 저너머에 대한 것을 영상에 담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에서 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그 세계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 절대자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미지의 세계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자 했고, 이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정치와도 연결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운명의 고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데에 ‘신앙심’만한 것이 또 어디있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건데, 이거야말로 공포정치가 아닐까. 사람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쥐고 흔드는.

비주얼이 상당한(?) 백미당의 초코아이스크림이다. 다행스럽게도 맛은 초코맛. (음?)


이번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좀비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종교에 너무나 심취한 캐릭터들이 이 세상에 실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다. 그래, 뭐든 과유불급이랬다. 신이 존재하건 그렇지 않건, 팩트는 그 절대자가 무언가를 해주지는 않는다는 거다.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병이 낫고, 대학에 합격하고, 원하는 곳에 취업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잘 살고, 마침내 천국 가고? 기도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인정, 하지만 기도만 해서 그 모든 것이 이뤄졌다고 보기엔 너무 소설 같은 일 아닌가. 만약 내가 그 기도(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를 듣는 입장이라면, 괘씸죄를 추가할 것 같지만, 뭐, 나는 절대자가 아니기에.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신에게 기도를 하던, 나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믿음을 가지기를 바란다. 스스로의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올 수 있는 정도로만 생각하길. 종교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종교인이 될 분들은 제외) 이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낸 절대자가 있다면, 넓디넓은 우주의 코딱지 만한 지구 위 깨알같은 인간들 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 같지만, 역시나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뭐, 절대자니까 그만큼 엄청난 능력으로 하나하나 컨트롤 하고 있을지도. 그래도 자기한테 집착하는 건 별로 안좋아할 것 같다. (당연히 이것도 그저 나의 상상) 간혹 그런 생각도 한다, ‘난 저런 생각을 한 적도, 그런 의도로 이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닌데, 재밌네’ 라고 그 절대자가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정작 작가는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교과서에만 들어가면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등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 글처럼 말이다.

어떤 소설 책 제목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자. 딱 그 정도만 하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정도, 그 정도로만 신과 함께 하자.
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절대 해선 안되는 이야기가 두 가지 있는데, 종교랑 정치랬다. ... 에라 모르겠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의 나열일 뿐이다. 가볍게 읽고 가볍게 넘기길. 깊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 나름대로 츄라이츄라이. 부디 무겁게만 읽지 말아주세요, 물론 무겁게 읽었다면 내 필력의 한계이니 반성합니다.

당신의 신과 함께, 행복한 밤이 되길.
오늘도 이만, 통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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