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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매디(마이 매디 다이어리)

프로 예민러의 세상 살기

by 김매디 202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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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다가 이런 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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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 이유는 사람마다 관계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에 둔감한 사람이 있고, 예민한 사람이 있다. 예민한 쪽이 타인의 둔감함 때문에 상처받을 가능성이 크다.

예민한 쪽에 가까운 사람은 '나보다 둔감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이 고단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타인이 자신만큼 예민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저 사람은 나와는 달라.' '나처럼 세상을 민감하게 바라보지 못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상대의 상태를 인지해보자.

"나는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예민해지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상대에게 분명히 밝히는 것도 필요하다.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해결된다.

둔감한 상대는 당신이 어느 지점에서 예민해지는지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얘기를 꺼내면 열의 아홉은 "몰랐다"면서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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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 작가님의 에세이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고 싶은 너에게>의 한 구절이었다. 파워 예민러로서 참으로 공감가는 구절이라 따로 책갈피(저장)도 끼워놓았다. 예민 of 예민이라 그런지, 사실 작가님이 제시하신 해결책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제로 그렇게 해결해 본 경험도 있기에 인정.

그러나 역시나 우리는 상대의 성향을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 다소 둔하지만 배려심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 상대의 예민함에 대해 받아주고 수용하며 고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다시 말해, 파워 예민러들은 그런 둔감함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예민하다는 건,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마 세상의 수많은 예민 보스들은 이미 둔감한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 나름의 츄라이츄라이를 해보았을 것. 그리고 둔감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려는 배려파들은 당연히 그 시도를 반겼을테고,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나마 굴러가고 있는 것일테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말로 해도 안되는 노답파들 때문이다. 그들은 백날 말해도 모른다. 우리는 말하고, 그들은 (흘려) 듣는다. 타협점은 절대 없다. 노답파들 중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다. 온건파는 상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나름 맞춰나가려고도 노력하지만, 타고난 성향 자체가 파워 둔감이라 자꾸 잊어버린다. 정말 노력하지만 둔감 회귀본능으로 인해 결국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온건파는 애를 쓴다. 코딱지만한 거에도 떽떽거리는 예민러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한다. 가장 문제는 강경파. 이들은 답이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들의 슬로건이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모른다. 그들의 유행어다. 자신의 투 머치 둔감함을 상대방의 지나친 예민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들이 세상의 평균치라고 생각해서 늘 더한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뭐, 예민한 사람들 중에서도 온건과 강경이 있을테고, 무엇이든 지나치면 안된다. 컵에 담은 물이 넘치면 바닥에 흐를테고, 누군가는 흘러넘친 그 물을 닦아야만 한다. 설상가상 그 물은 똥물일 가능성이 높다. 제발, 우리 뭐가 되었든 넘치지 말자.

어쨌든 내가 놀랐던 포인트는, 열의 아홉이 그 말을 듣고 고치려고 한다는 문장. 열의 아홉? 열의 하나가 아니라?

나이가 먹을수록 사람은 단단해진다. 자신의 나이만큼 두꺼운 벽들이 하나씩 하나씩 세워진다고 보면 된다. 유치원생들은 7개의 벽을 허물면 그 아이의 생각을 바꿀 수 있지만, 반면 연세가 80세이신 할아버지의 생각을 바꾸려면, 우리는 80개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게다가 그 벽은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하나하나가 더더욱 단단해졌을 것. 벽 하나를 부수는데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걸릴테다. 그럼에도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를 고치려하는 게 아니라 서로 맞춰가려고 하기 때문이겠지. 애초에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랬다. (아, 물론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닌 건 알지만)

나는 고기국수를 참으로 좋아한다. 서울에서의 고기국수 였지만, 마음만은 제주에. 제주도 가고 싶다!


예민러들의 눈에는 참 많은 것들이 거슬릴 것이다. 잡아 뜯어 고치고 싶은 게 한 두개가 아닐 터.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알테다, 결국 그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라는 것을. 적당히 포기하면 편하다. 이건 진짜 삶의 진리다. 내가 신이 아니고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다.

완벽주의는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워보이지만, 결국 그게 속을 썩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기계조차 실수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완벽을 추구해도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완벽하려고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냥 반대로 생각하라는 거다. 우린 완벽하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절대. 그리고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약간의 인간미는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는 오히려 둔감한 이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조금 천천히, 조금은 무디게, 날 세우지 않고 둥글게.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왜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지?
라고 생각하지 말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 사람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물음표를 줄여야 한다. 어차피 명쾌한 답이 돌아올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 말자.

한 때 하루의 대부분을 물음표와 함께 했던 때가 있었다. 불만이 가득했고, 미간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매사에 입을 닫은 채로 질문하며 화를 냈다. 아주 신기한 게 있는데, 불만은 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A라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A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것들이 꼴보기가 싫어진다. 그러다보면 B도 싫어지고, 역시나 그로부터 꼬리를 무는 모든 것들이 싫어진다. 그렇게 세상을 불편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그랬었다.

내가 지금처럼 생각하게 될 수 있었던 건 환경적인 변화가 가장 컸고, 그 다음은 주변 사람의 변화였다. 긍정의 힘은 생각보다 매우 커서, 잠깐만 함께해도 쉽게 사람을 녹아내리게 한다. 2년 전 처음 만나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나의 직장 동료는 모든 것의 장점을 먼저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다를 때에도,
-그래,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지.
라며 늘 마침표로 대화를 맽는 사람. 그래서 나의 물음표에도 늘 마침표로 대답해주었다.
-왜 그런 걸까요?
-그러게, 왜 그럴까, 그래도 이러이러한(대충 긍정적인 내용) 걸거야. 너무 마음쓰지마.
그녀의 힘은 부드러웠지만, 아주 강력했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그녀에게 마침표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 이후로 나의 미간도 소멸을 면했다.

나도 모르게 예민 지수가 폭발할 때는, 단 걸 먹으러 간다. <엘리스 케이커리>의 초코케이크와 레모네이드. 천국의 맛이다.


물론 내 기본 바탕은 변하지 않았다. 난 여전히 프로예민러다. 다만, 쓰잘데기 없는 데에 감정소모 하기를 그만둔 것 뿐이다. 내가 물음표를 던져야 할 만한 곳에만 던진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음표를 던질 땐 되도록 입 밖으로 꺼낸다. 속으로 삭히지 않고 꺼내서 증발시킨다. 그래야 내 속이 시커멓게 타는 걸 막을 수 있다. 입 밖으로 꺼내야 사라지고, 어딘가에서든 마침표를 얻어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게 물음표를 던질 때에도 되도록이면 마침표로 답하려고 한다. 물음표와 물음표의 만남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킬 뿐이다.

주변에 대화를 할 때 자꾸 물음표로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계하길.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 너무 뭐 같을 때, 분노를 대방출 하고 싶은 날, 그럴 때 만나면 좋다. 아주 가끔은 분노를 빵! 터뜨리는 게 속이 시원해지기도 하니까.

결국은 어느정도 도화동 작가님과 같은 맥락. 하지만 애초에 상대가 고쳐질 거라고 기대하지 말자. 반대로 누가 나를 고치겠다고 덤비면 기분이 좋을까. 여지껏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저 우리는 맞춰가는 거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나아가는 것일 뿐. 일방적인 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어떤 관계에서던지 결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다. 물론 맞춰갈 생각 없는 노답파는 깔끔하게 거르자, 각자의 인생에서. 그들은 공존을 포기한 이들이니,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 도태될 예정이다, 안쓰럽게 바라보자.

프로예민러의 구시렁구시렁은 여기까지다.
이런 나와 같이 해주어 쌩유베리감사, 럽유쏘머치.

오늘도 이만, 통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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